농촌선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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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부터 제주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주 동쪽 구좌읍 하도리 해안가 마을에 위치한 교회부설 지역아동센터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지요. 시골 마을의 작은 예배당 아래층에 마을의 유일한 방과 후 돌봄 시설인 아동센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센터에는 스무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끌벅적하게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더군요. (아이들은 대부분 돌봄취약계층으로 기초수급자가정, 다문화가정, 한 부모 또는 조손가정의 자녀들이지요.) 시내에 돈 벌러 다니는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밭일하시는 농부 부모님들도, 물 때 맞춰 물질하러 가시는 해녀 할머니도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지낼 수 없긴 마찬가지! 아이들은 방학 때에도 눈만 뜨면 센터에 와서 하루 종일 지내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창 에너지가 왕성한 아이들 스무 댓 명이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평화롭게 지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매일같이 부딪히고 싸우고 울곤 하는 아이들을 보며 새로운 일상을 선사해 주고 싶었습니다. 봄볕을 재촉하여 바깥 놀이로 신선한 바람을 공급하였지요. 미니 축구 한 판이나 동네 한 바퀴 산책만으로도 실내에서만 노느라 팽팽해진 갈등을 조금씩 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 코로나19 주의보가 들이닥쳤습니다. 무서운 전염병 뉴스로 인해, 센터 창밖 너른 들판과 푸른 하늘은 그저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지요. 몇 날 며칠 철저히 바깥 활동을 금하자, 이미 봄바람을 맡은 아이들은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리사 선생님께서 출근길에 냉이 한 봉지를 캐어 들고 오셨습니다. 추수하고 갈아엎어 놓은 동네 당근 밭을 지나오는데 지천으로 냉이가 자라고 있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들이 가고 싶은 아이들이 우리도 냉이 캐러 가요~~”하며 졸랐습니다. 마스크로 중무장을 시키고 동네 당근밭, 아니 냉이밭으로 갔습니다.


사진1 밭담.jpg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기로 유명한 제주 당근의 주산지가 바로 이 고장 구좌 입니다. 오랜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도. 그 중앙에 한라산이 만들어질 때 용암 분출물들이 제주 동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해안가에 넓은 경작지를 만들었지요. 검은 빛깔의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밭은 뿌리채소가 자라기 좋은 토양입니다. 하여 이 고장의 주된 농산물이 무와 당근이랍니다. 따뜻한 제주의 날씨는 가을에 파종한 무나 당근이 펄펄 내리는 눈을 맞고도 파릇파릇하니 겨울을 나게 합니다. 검은 현무암 밭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평평한 들판은 온통 초록 초록 물결입니다. 거센 동풍에 넌출넌출 춤추는 싱싱한 무청!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연둣빛 물결은 당근! 당근이지요! ^^ 

제주도는 꽁꽁 대지가 얼어붙는 육지와는 달리, 초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당근을 수확합니다

사진3 냉이밭.jpg


이른 겨울 일찌감치 추수가 끝난 마을 어귀의 당근 밭은 트랙터로 잘 갈아엎어져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었지요. 그 위에 바람에 날려 온 냉이 씨가 잔디밭처럼 뒤덮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 화산재와 모래가 섞인 듯 부드러운 밭 흙은 호미를 쓰지 않아도 쉽게 냉이를 내어 주었습니다. 여린 냉이 잎을 모아 쥐고 살살 흔들기만 해도 쏘옥 뿌리까지 빠져 나왔습니다. 냉이 캐러 가자고 노래 부르던 아이들을 막상 냉이 밭에 풀어 놓자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냉이를 잡초와 구별할 줄 아는 친구가 스무 명 중에 딱 한 명 있더군요. 아이들에게 여린 냉이 잎을 자세히 관찰해보라고 한 뒤에 흩어져 냉이를 캐게 하였습니다. 물론 맛있는 냉잇국을 먹으려면 뿌리째 캐내어야 한다고 당부를 하구요.

 

인간에겐 원시 수렵채집 시대의 본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은 나누어 준 비닐봉지에 냉이 반, 잡초 반 마구 뽑아 넣느라 마스크 위로 반짝이는 두 눈이 쉴 새가 없었답니다.

 

선생니임~~~~~~~이것 보세요~~~~~주황색 냉이 좀 보세요~~~~~~~~~~~”

 

저 멀리 밭담 아래에서 작업(!)을 하던 일학년 여자아이가 헐떡거리며 뛰어 왔습니다.

 

이것 보세요~~~ 요렇게 예쁜 냉이 제가 캤어요~~~~~~~”

 

아이는 제 새끼손가락만 한 가는 당근 뿌리를 뽑아 들고 주황색 예쁜 냉이를 캤다며 의기양양해 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 당근 씨가 때늦게 실뿌리같이 자란 걸 뽑아 들고 말이지요.

 

그러자 우우 몰려들어 그 신기한 냉이를 보던 아이들이 저마다 나도, 나도 예쁜 냉이를 캘 거야~~”하며 밭 가장자리로 흩어졌습니다. 연이어 탄성이 터졌지요.

 

와아~~진짜 큰 냉이예요. 완전 주황색 냉이!!!”

이것 좀 보세요~~~~ 이건 엄청 뚱뚱한 냉이예요.”

 

아이들 손에 들린 것은 금붕어만한 뿌리에서부터 제법 토끼에게 어울릴 만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귀여운 뿌리들이었습니다.

 

하이고 ~그게 무슨 냉이야~ 당근이지 당근!”

 

멀리서 냉이 캐느라 정신 팔려 있던 5학년 언니가 다가와 한심하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1학년 남자아이가 말합니다.

 

누나! 당근이 땅속에서 나오는 거야? 당근 풀(?)이 자라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거 아냐?”

 

........................

 

으흡........”

 

농촌 마을 어린이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지요.

당근이 고추나 토마토처럼 열매로 따먹는 줄 알고 있던 일학년 아이의 아빠는 당근 밭에 품을 팔러 다니는 농부이시더군요.

아이들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밭에 심어진 당근 풀(!)을 수없이 보고 다녀도 그림책에서 보던 당근 뿌리와 연결 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이 많아진 날이었습니다.

 

 

이 동네의 무 농사, 당근 농사는 대부분 기업농의 형태로 경작되고 있답니다. 토지주나 영농법인이 넓은 밭을 소유하여 기계로 밭을 갈고 씨 뿌리고, 때가 되면 인력회사를 통해 고용된 일용노동자들이 수확합니다. 매끈하게 상품성이 있는 무, 당근만 거두어 일정한 유통망을 통해서 판매되는, 공산품 생산과정과 흡사한 생산체계에서는 농부 아빠의 노동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녀에게 철저히 소외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진4뽑힌 무.jpg  사진5버려진 무.jpg


농부 아빠가 밭을 갈고 당근을 수확하는 현장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고도 얼마든지 당근 주산지 마을에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일당 노동자로 농토에 소외되어 있는 농부 엄마 아빠는 늘 바쁘고 지쳐 있습니다. 부모들과 양지바른 봄볕을 즐기며 나물 캐는 경험을 나눌 수 없었던 친구들이지요. 험한 세태에 안전이 우선이라고 학교와 센터와 집을 셔틀을 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 아이들이 냉이 잎과 당근 잎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으며, 냉이 뿌리와 당근 뿌리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진6 요게 냉이지요.jpg


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우리 아이들은 교육이란 이름으로 생애 처음부터 일상의 실물보다는 간접자료인 그림으로, 책으로 또 영상으로 단어를 익히고 학습을 하게 되는 현실에 살고 있지요. 가나다라...ABC.......이른바 공부라는 것이 마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나물과 작물들을 애당초 아이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 날 그 밭에서 아이들은 냉이와 당근을 구별 할 수 있게 되었고, 넓은 밭에 초록 물결을 이루는 부드러운 잎 아래 땅속에서는 시린 겨울바람 이겨내느라 빨개지도록 발을 부비대며 당근이 자라고 있음을 모두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오후, 함께 캐어 온 냉이와 당근을 자세히 보고 그림도 그리고 자신이 캔 냉이 뿌리, 아니 당근 뿌리를 씻어 맛있는 간식으로 달게 먹었습니다. 김밥에 든 당근을 하나하나 골라내던 친구까지도요


사진7우리가 캔 당근 자세히 보고 그리기.jpg


부디 우리 지역아동센터의 하루하루가 그 날 그 당근 밭에서처럼 생활과 배움이 하나가 되어 아이들 얼굴에서 사물을 알아 가는 기쁨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나날 되길 기도합니다.


사진8동네 한 바퀴.jpg


아이들그림-그림일기.jpg


아이들그림-냉이와 당근.jpg


아이들그림-주황색 예쁜 냉이.jpg


아이들그림-즐거운 냉이 당근 캐기.jpg

?
  • ?
    빈배 2020.05.01 12:58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군요!
  • ?
    단근당근 2020.05.05 17:07
    아이들이 자연과 함께 자랄 수 있어서 부럽네요~~ 아이들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함박웃음 지어집니다. 들에서 냉이캐고 나서 진행한 학습의 당근 그림이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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